Untitled

열린 창문 틈 사이로 솔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향긋한 풀 내음 그리고 5월의 장미. 내가 좋아하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장면들. 길을 걷다 걸음을 우뚝 멈출 만큼 그윽한 아카시아향도 좋지만 언제 맡아도 질리지 않는 소박하고 싱그러운 풀냄새가 더 좋다. 어느새 연두 빛 여린 잎 대신 여백 하나 없이 초록빛으로 가득 찬 우리 집 거실 창을 바라보며 ‘이렇게 또 봄이 가버렸구나···’ 언제 떠났는지 모를 봄을 잠깐 추억해본다. 아쉬움도 잠시 곧 짙은 녹음으로 가득할 우리 집 여름 풍경이 떠오르고, 그 풍경은 그와 내가 처음 집을 꾸리던 그 해 여름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.

처음 이 집을 보러 왔던 날, 가장 먼저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거실 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과 뒷산이었다. 늘 창 너머 풍경을 품고 살고 싶던 내가 초록으로 뒤덮인 이 곳의 여름 풍경을 상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. 주변에서는 뒤에 바로 산이 있어 벌레도 많이 나오고, 저층은 보통 선호하지 않는다며 나를 만류했다. 그림 같은 풍경과 현실적인 부분을 재고 따지면서도 거실 창 밖을 향한 진득한 내 시선을 읽으셨던지 당시 집주인분께서는 한마디를 더 덧붙이셨다. "이 앞에 나무들이 벚꽃 나무 에요. 벚꽃 철이면 얼~마나 예쁘게요." 그 말은 200% 내 마음을 저격했다.

연식이 제법 오래된 아파트였기에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았다. 늦은 봄부터 시작한 공사는 여름 즈음 마무리되었고, 처음으로 초록이 가득한 거실 밖 풍경을 마주하던 날, 감탄하고야 말았다. 이런 풍경을 매일 보고 산다면, 마음이 절로 너그러워질 것 같다며. (살아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라···. 무엇보다 집에서 풍경을 감상할 시간이 없다.) 그렇게 초록의 풍경과 함께 시작된 나의 결혼 생활 위로 으레 시작하는 다른 부부들이 그러하듯 시시콜콜한 다툼의 풍경들이 켜켜이 쌓여갔다. 그 중 가장 잦은 빈도로 충돌한 건 청결에 대한 기준이었다.

“그…. 손으로 안 잡고 먹어주면 안될까?” 빵또아를 한 입 왕-! 베어 물려던 순간이었다. ‘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람. 손으로 안 잡고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먹어?’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떴다. 멍청한 내 표정을 읽었던지 그가 덧붙인 한마디는 나를 더 당황케했다. “내 손으로 잡고 먹는 것도 나는 찝찝해서 아이스크림 봉지로 싸서 잡고 먹거든···”

맙소사. 이 말을 들으니 내 머릿속에 가라 앉아있던 연애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. 31가지 아이스크림을 파는 그 곳에서 “콘으로 드릴까요? 컵으로 드릴까요?” 라는 점원의 말에 “콘으로 주세요!” 를 외치고 아이스크림을 포장해서 나오는 길, 그는 나에게 “콘으로 먹어도 괜찮겠어? 다른 사람들이 손으로 잡았던 건데.” 라는 말로 나를 벙지게 만들곤 했었지. 그 외에도 그는 청결에 관한 생각지도 못한 발언으로 종종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. 그의 청결에 대한 어록을 읊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분량 관계상 생략하도록 하겠다. 여하튼 더러운 걸 못 보는 남자와 더러운 게 안 보이는 여자가 한집에 살게 되며 더 구체적인 상황에서 청결에 대한 기준이 불일치했고, 그때마다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. 급기야 가정 내 평화를 위한 청결조약을 체결하기로 한다. 207동 310호의 청결조약은 아래와 같다.

   침대는 신성한 곳. 깨끗한 잠옷을 입은 경우에만 입장 가능.

   세탁실, 현관 바닥을 발로 밟는 것을 금한다. 각 공간 별 욕실용 슬리퍼를 두고 착용한다.

   택배 박스는 중문 안을 통과할 수 없다. 전실에서 개봉 후 내용물만 입실 가능.

   설거지는 먹은 즉시 해결한다.

   침대 위 취식불가. 입 안에 쏙 들어가서 부스러기를 흘리지 않는 초콜릿이라도 예외 없음.